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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가타카〉(1997)와 〈엘리시움〉(2013)은 모두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한 SF 작품이지만, 그 중심에는 ‘불평등’이라는 공통된 주제가 놓여 있다. 다만 두 영화가 이 문제를 풀어내는 방식은 확연히 다르다. 〈가타카〉는 유전적 차별이라는 과학적 설정을 통해 ‘개인의 의지와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엘리시움〉은 자본 계층의 극단적 분리를 통해 ‘사회 구조의 폭력성’을 드러낸다. 이 두 작품은 ‘누가 자격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인간이 만든 차별과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를 각각 다른 톤과 방식으로 그려낸다.
1. 유전자 vs 부, 차별의 시스템이 다르게 설계된 가타카와 엘리시움
〈가타카〉의 세계에서는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에 유전적으로 ‘설계’된다. 이른바 ‘유전자 우성자’와 ‘자연 출생자’로 구분된 이 사회는, 완벽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만이 고급 직업과 기회를 부여받는다. 주인공 빈센트는 자연 출생자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심장 질환 가능성 99%’라는 평가를 받고 우주비행사의 꿈을 포기해야 했다. 그가 꿈을 이루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신분 도용’. 유전적으로 우성자인 사람의 신체 정보를 빌려 정체를 숨기고 조직에 들어간다. 반면 〈엘리시움〉은 기술과 자본에 의해 계층이 나뉜 사회를 묘사한다. 지구는 빈곤과 범죄로 가득 찬 버려진 공간이고, 부유한 엘리트들은 고급 우주정거장 ‘엘리시움’에서 병도 없고, 스트레스도 없는 삶을 영위한다. 이 세계에서의 차별은 유전자가 아니라 돈과 신분에서 비롯되며,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지구 출신이라면 엘리시움에 입장조차 할 수 없다. 두 영화는 차별을 설정하는 ‘기준’은 다르지만, 그 시스템이 얼마나 견고하고 절대적인지를 강조한다. 〈가타카〉의 유전자 차별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엘리시움〉의 계급 차별은 보안과 시스템이라는 이름으로 유지된다. 결국 두 영화 모두, 차별은 인간이 만든 것이며, 그 안에서 누군가는 탈출하려 하고, 누군가는 그것을 수호하려 한다.
2. 주인공의 저항 방식 – 조용한 침투 vs 직접 충돌
〈가타카〉의 빈센트는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숨기고 우성자의 정보를 도용해 체계 내부로 들어간다. 그는 드러나지 않게, 조용히, 규칙을 지키는 척하며 시스템을 무너뜨리려 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보다 ‘더 완벽한’ 우성자들의 뒤를 이어 시험을 통과하고, 결국 우주비행사로 선발된다. 그의 저항은 외부의 폭력이 아니라, 내부의 인내와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반면 〈엘리시움〉의 맥스(맷 데이먼 분)는 전형적인 반항자다. 방사능 사고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는, 삶을 연장하기 위해 엘리시움에 침투한다. 하지만 그의 싸움은 곧 개인의 생존을 넘어, 시스템 전체를 뒤흔드는 혁명으로 확장된다. 그는 엘리시움의 의료 시스템을 모든 인류에게 개방시키는 해킹을 감행하며, 죽음을 각오한 폭력적 방법으로 시스템을 흔든다.
두 인물 모두 ‘허용되지 않은 존재’이지만, 시스템을 깨는 방식은 매우 다르다. 빈센트는 ‘제도를 가장 완벽히 통과함’으로써 모순을 드러내고, 맥스는 ‘제도를 폭파함’으로써 그것을 전복한다. 이 차이는 영화가 지향하는 메시지와 분위기를 분명하게 구분짓는다: 하나는 조용한 희망이고, 다른 하나는 분노의 해방이다.
3. 인간의 가능성을 말하는 방식 – 개인의 의지 vs 집단의 해방
〈가타카〉는 인간의 한계가 ‘유전자’라는 과학적 운명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의지가 있다면, 열등하다고 규정된 사람도 최고의 자리에 이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빈센트는 자신이 ‘가능성 1%’인 존재라는 낙인을 거부하고, 끊임없는 노력과 위장을 통해 그것을 증명한다. 이 영화는 과학 기술이 인간을 구분 짓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며, 인간의 가능성은 의지에서 비롯된다는 고전적인 인본주의 메시지를 따르고 있다. 반면 〈엘리시움〉은 ‘개인의 노력’으로는 구조적 차별을 이겨낼 수 없다는 현실을 전한다. 아무리 강한 의지와 능력이 있어도, 엘리시움이라는 폐쇄된 공간은 그 자체로 진입 불가능한 벽이다. 그래서 맥스의 행동은 단지 자신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시스템 전체를 해킹하여 모두가 동등하게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만드는 ‘사회적 전복’으로 이어진다. 〈가타카〉가 ‘너 자신을 증명하라’고 말한다면, 〈엘리시움〉은 ‘모두가 같이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는 개인의 서사이고, 하나는 집단의 서사이며, 두 영화는 각각의 메시지를 통해 ‘차별을 넘어서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남긴다.
결론: 차별은 어디서 오고, 우리는 어떻게 맞설 수 있을까
〈가타카〉와 〈엘리시움〉은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지금 우리의 현실을 거울처럼 반영한다. 유전자이든, 계급이든, 기술이든, 인간은 끊임없이 경계를 나누고 우열을 판단하려 한다. 하지만 두 영화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 경계를 넘어선다. 한 사람의 용기, 혹은 한 사람의 희생으로. 이 두 작품을 통해 우리는 묻게 된다. "나는 시스템에 침투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바꿀 것인가?" 그 어떤 선택이든, 중요한 것은 차별의 구조에 무관심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를 본 우리 또한, 그 선택의 순간 앞에 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