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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빌론

 

바빌론(2022)은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연출한 영화로, 1920년대 할리우드의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 전환되던 격변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영화는 초창기 영화 산업의 화려함과 동시에 그 속에 내재한 광기, 혼란, 예술과 타락의 공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등장인물들은 성공을 향한 열망과 몰락의 그림자 사이를 오가며, 엔터테인먼트 산업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시험받는다. 바빌론은 화려하고 격정적이지만 동시에 파괴적이었던 영화 산업의 초창기를 생생하게 포착하며, 관객에게 영화가 무엇인지, 예술이란 무엇인지를 묻는다.

 

1. 사운드 도입 이전과 이후, 영화 산업의 대격변

1920년대 후반, 영화 산업은 역사상 가장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 바로 '사운드의 도입'이다. 바빌론은 이 전환기의 혼란을 가장 극명하게 묘사하는 작품 중 하나다. 무성 영화 시대의 스타였던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 분)는 카리스마와 외모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지만, 사운드 도입 이후에는 연기 방식과 기술적 적응의 한계를 겪으며 점점 퇴장한다. 이는 찬란한 스타의 몰락을 상징하며,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예술가가 어떤 운명을 맞게 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반면, 신예 배우 넬리 라로이(마고 로비 분)는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하고자 분투하지만, 점점 더 자극적이고 상업적인 요구에 휘말리면서 본래의 자아를 잃어간다. 그녀의 캐릭터는 영화계가 어떻게 스타를 상품화하고, 동시에 소비해버리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기술적 변화는 단순한 진보가 아니라, 영화 산업 전반에 걸친 패러다임의 변화를 의미하며, 예술가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다. 영화는 사운드 녹음 장면을 통해 변화의 불편함과 긴장감을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무성 영화 촬영과는 달리, 소리에 민감한 마이크 위치, 배우의 호흡, 무대 밖 소음까지 통제해야 하는 상황은 배우와 스태프 모두를 극한으로 몰아넣는다. 이 장면들은 기술적 진보가 항상 예술의 진보를 의미하지는 않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2. 예술을 위해 파멸로 달려가는 사람들

바빌론의 인물들은 모두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였지만, 그들이 경험하는 현실은 꿈꾸던 낙원이 아니다. 이 영화의 제목 ‘바빌론’이 성경 속 타락의 도시 바벨에서 따온 것처럼, 영화는 예술과 성공을 쫓는 사람들의 타락과 파멸을 정면에서 그려낸다. 특히 잭 콘래드는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며, 자신이 사랑하던 예술이 어떻게 상업화되어가는지를 바라보면서 내적 허무에 시달린다. 또한, 넬리는 사랑받고 싶은 욕망, 무대 위의 흥분, 예술적 정체성을 동시에 추구하지만, 그녀가 마주하는 것은 영화계의 냉혹한 현실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파티와 환각, 자극 속으로 빠져들며 점점 스스로를 파괴해간다. 그녀의 몰락은 단순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산업이 어떻게 한 사람을 소모하고 버리는지를 보여준다. 매니(디에고 칼바 분)의 캐릭터는 더욱 아이러니하다. 그는 처음에는 영화 산업을 동경하며 진입하지만, 점점 그 산업의 이면을 보게 되면서 도덕적 갈등과 현실적 타협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그는 그 속에서도 예술을 지키려 하지만, 결국 자신도 타협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인다. 이처럼 바빌론은 예술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이들이 결국 무엇을 잃게 되는지를 보여주며, 관객으로 하여금 예술과 파멸 사이의 경계를 생각하게 만든다.

 

3. 현실보다 더 혼란스러운 영화 속 ‘현실’ 묘사

바빌론은 영화 속 영화, 즉 메타 영화적인 장치들을 통해 영화 산업 자체를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화려한 파티, 황당한 로케이션, 수많은 엑스트라와 동물들이 한 장면을 위해 소모되는 대규모 촬영 장면은 영화 산업의 현실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이는 관객들에게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왜 이런 방식으로까지 만들어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특히 초반부 파티 장면은 ‘광기의 시작’을 상징하는 시퀀스로, 알코올, 마약, 욕망이 난무하는 공간 안에서 인간은 통제 불가능한 존재로 변한다. 셔젤 감독은 이 장면들을 통해 영화계가 예술과 자본, 이상과 타락 사이에서 얼마나 극단적인 이중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시청각적으로 압도한다. 이 ‘과잉’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으며, 때로는 역겨울 정도로 자극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후반부, 매니가 극장에서 싱잉 인 더 레인을 보는 장면에서 우리는 영화의 또 다른 얼굴을 본다. 모든 혼란과 타락 속에서도 영화는 여전히 감동을 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영화가 끝없이 복잡하고 모순적인 구조 안에 있더라도, 그 안에는 순수한 감정과 예술적 영속성이 살아 있다는 것을 셔젤은 마지막 장면을 통해 조용히 말하고 있다.

 

결론: 예술과 욕망의 도시, 바빌론

바빌론은 영화가 어떻게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어떻게 파괴하며, 동시에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보여주는 역설적인 영화다. 사운드 도입이라는 기술적 진보는 한 세대를 지우고 새로운 세대를 낳으며, 예술가들은 그 속에서 사랑과 명예, 고통과 파멸을 동시에 경험한다. 이 작품은 영화계의 광기와 비극을 낭만화하지 않고, 날것 그대로의 현실로 그려내며 관객들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이 영화를 본 후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예술을 향한 열망은 어디까지 순수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열망은 우리를 어디로 이끌 것인가?" 바빌론은 그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영화라는 예술이 가진 끝없는 모순과 아름다움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