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버닝 vs 기생충

 

버닝(2018)과 기생충(2019)은 모두 한국 사회의 계급 문제를 다루는 영화이지만, 표현 방식과 정서적 밀도는 확연히 다르다. 두 작품은 각각 이창동 감독과 봉준호 감독이라는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주의 감독의 손에서 탄생했으며,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과 인간 내면의 불안을 서스펜스적인 분위기로 풀어낸다. 버닝은 미스터리와 은유로, 기생충은 블랙코미디와 장르적 전환을 통해 현실을 비튼다. 두 영화는 모두 불편하고, 명쾌하지 않으며, 그 안에서 관객은 현실보다 더 날카로운 ‘진실의 감각’을 느끼게 된다.

 

1. 보이지 않는 계급의 차이, 감각적 불균형으로 그려낸 버닝과 기생충

기생충은 ‘반지하’와 ‘대저택’이라는 물리적 공간의 대비로 계급을 시각적으로 명확히 보여준다. 반면 버닝은 훨씬 더 은유적이고 모호한 방식으로 계급 차이를 묘사한다. 종수는 빈곤한 환경 속에서 육체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인물이고, 벤은 해외를 자유롭게 드나들며 고급 외제차를 몰고 다니는 인물이다. 하지만 벤이 종수보다 확연히 ‘우위에 있다’는 사실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관객은 종수의 불편한 시선을 따라가며 ‘무언가 다르다’는 감각만으로 차이를 체험한다. 두 영화 모두 계급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침투한다. 기생충에서는 냄새라는 감각이 결정적인 계급 구분의 도구로 등장하며, 버닝에서는 벤이 느끼는 삶의 여유, 지루함, 그리고 취미로 하는 '비닐하우스 태우기'가 은연중에 권력자 특유의 냉소를 담는다. 계급은 단지 돈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자체의 차이라는 것을 두 영화는 각자의 언어로 설명하고 있다.

 

2. 불편한 긴장과 모호함, 장르를 비트는 연출의 차이

이창동 감독은 버닝을 명확한 해답을 주지 않는 미스터리로 구성한다. 혜미의 실종 이후 이야기는 점점 더 모호해지고, 관객은 진실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로 몰린다. 반면, 기생충은 초반에는 유쾌한 가족극처럼 시작하다가 중반 이후에는 스릴러, 후반에는 비극적 파국으로 변모하며 장르의 변화를 극적으로 활용한다. 두 영화 모두 장르의 문법을 자유롭게 비틀며, 관객에게 긴장을 유도하지만 방식은 매우 다르다. 버닝의 긴장은 ‘모르겠다는 불안’에서 온다. 벤이 정말 살인을 했는지, 혜미는 어디로 갔는지, 이 모든 것은 종수의 상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영화 내내 존재한다. 반면, 기생충의 긴장은 ‘드러나는 진실’에서 온다. 지하실의 존재, 박 사장의 무의식적 차별, 결국 폭력으로 이어지는 계급 간 충돌은 점점 명확해지는 현실로 다가온다. 두 감독은 모두 사회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은 압박감을 느낀다. 이 불편한 공기는 설명이 아니라 ‘느낌’으로 전달되며, 영화가 끝난 후에도 긴 여운을 남긴다. 버닝은 결말조차 확실하지 않게 끝내며, 관객을 질문 속에 남겨두고, 기생충은 비극적인 사건 이후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환상으로 마무리하며 다시 한번 계급의 벽을 상기시킨다.

 

3. 관객의 위치, 누구의 시선으로 세계를 보는가

버닝은 철저하게 종수의 시선을 따라간다. 그는 혼란스러워하고, 의심하며, 분노하지만 결국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그의 불안은 곧 관객의 불안이 된다. 이창동은 ‘사실’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관객이 느끼는 모호함 자체를 현실의 일부로 만든다. 우리가 뉴스와 SNS에서 접하는 세상도 마찬가지다. 진실은 쉽게 드러나지 않으며, 해석은 항상 분열된다. 기생충은 가족 전체의 시선을 따라가지만, 가장 중심에 있는 인물은 기택이다. 그 역시 현실의 벽을 넘고 싶어 하지만, 박 사장의 태도 속에 담긴 미묘한 차별과 냉소를 감지하며 점점 무너져간다. 영화 후반, 기택이 폭발하는 순간은 관객에게 묵직한 카타르시스를 주지만 동시에 질문을 던진다. "정말 이게 최선이었을까?" 두 영화 모두 주인공이 사회 구조 속에서 무력한 개인이라는 점에서 닮아 있다. 하지만 버닝은 질문을 남기며 관객을 주체로 만들고, 기생충은 구조적 진실을 드러내며 강한 메시지를 던진다. 전자는 사유의 영화이고, 후자는 분노의 영화라고도 말할 수 있다.

 

결론: 같은 사회를 말하지만, 전혀 다른 언어로

버닝과 기생충은 모두 한국 사회의 단면, 특히 계급 문제를 중심에 두고 있지만, 그 접근 방식은 극명히 다르다. 버닝은 모호함과 상징을 통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기생충은 장르의 전복과 시각적 대비를 통해 직접적인 감정과 메시지를 전달한다. 전자는 차가운 관찰, 후자는 뜨거운 해부다. 이 두 작품을 비교해보면, 한국 영화가 사회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과 표현 방식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를 실감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여전히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이 구조 속에서, 나는 어떤 위치에 서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