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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2019)는 김보라 감독의 데뷔작으로, 1994년 서울을 배경으로 한 소녀 ‘은희’의 섬세한 성장기를 그려낸 작품이다. 이 영화는 어떤 특별한 사건보다는, 우리가 지나쳐온 평범한 일상의 순간들이 얼마나 깊고 아플 수 있는지를 말한다. 중학생 소녀 은희는 가족 안에서도, 학교 안에서도, 친구 사이에서도 늘 어딘가 고립되어 있으며, 세상의 균열을 조용히 목격하고 내면으로 흡수해간다. 벌새는 사소해 보이는 감정들 속에서 성장하고 상처받는 청춘을 정적인 화면과 절제된 연출로 조명한 영화다.
1. 은희의 시선으로 본 세계, 왜곡된 가족의 단면
은희는 14살 소녀다. 하지만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른들의 세상과 전혀 다르다. 특히 가족 내에서 은희는 투명한 존재다. 아버지는 권위적이며 폭력적이고, 어머니는 감정을 숨긴 채 가부장적 구조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오빠는 은희를 때리면서도 죄책감은 느끼지 않고, 언니는 자기 앞가림으로 바쁘다. 가족은 ‘함께’ 있지만, 결코 서로에게 온전한 관심을 주지 않는다. 이런 구조 속에서 은희는 침묵을 선택한다. 그는 가족 안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어느 날 귀에 이상 증세가 생겨 병원에 가게 되지만, 부모는 그것조차 진심으로 걱정해주지 않는다. 영화는 은희가 가족 안에서 얼마나 고립되어 있는지를 외면적인 대사나 사건이 아니라, 오랜 정적과 정면 샷, 반복적인 일상 속에 스며드는 작은 변화로 보여준다. 카메라는 종종 은희의 뒷모습을 따라간다. 이는 그녀가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동시에, 관객이 은희의 시선과 감정을 더 가까이서 느낄 수 있도록 만든다. 폭력은 일상적이며, 감정은 말보다 침묵으로 표현된다. 은희의 세계는 조용히 무너지고 있지만, 아무도 그것을 제대로 바라봐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시선은 우리 사회의 수많은 은희들을 반영한다.
2. 영지 선생님과의 만남, 처음으로 느낀 이해받는 감정
은희의 삶에 있어서 결정적인 변화는 ‘영지 선생님’과의 만남이다. 학원 한문 선생님인 영지는 다른 어른들과 다르다. 그녀는 은희에게 관심을 갖고,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받아들인다. 은희가 처음으로 “괜찮냐”는 말을 들은 것도, 눈을 마주치며 진심 어린 위로를 받은 것도 영지를 통해서다. 영지는 사회적 운동에도 참여하고, 학생들과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자신의 약한 모습도 숨기지 않는다. 그녀는 이상적인 인물이라기보다,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어른’이다. 그래서 은희는 처음으로 ‘이해받았다’는 느낌을 경험한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소박하고, 감정은 차분하지만, 그 안에는 그 어떤 폭발적인 장면보다 강한 울림이 있다. 영지는 은희에게 “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태도, 듣는 자세, 다정한 눈빛은 은희에게 그것보다 더 확신 있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결국 은희는 스스로의 감정을 인식하게 되고, 세상에 맞서는 작은 힘을 갖게 된다. 이 관계는 성장 영화에서 흔히 그려지는 ‘구원자’ 캐릭터와는 다르다. 영지는 은희를 구하지 않고, 은희가 스스로를 바라보도록 돕는다.
3. 사소한 일상 속의 흔들림, 그리고 조용한 성장
영화는 극적인 사건 없이 흘러간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은희의 세계가 조용히, 그러나 뚜렷하게 흔들리고 있다. 친구와의 관계, 연애의 시작과 끝, 선생님의 죽음, 병원 진단 결과, 친구와의 갈등, 서울 한복판에서 터진 성수대교 붕괴 사고. 이 모든 사건은 겉으로는 작고 일상적인 듯 보이지만, 은희에게는 세상을 인식하는 틀을 완전히 뒤바꿔놓는 계기가 된다. 특히 성수대교 붕괴 사고는 단지 역사적 배경이 아니라, 은희의 내면과 세상의 균열을 동시에 상징하는 사건이다. 은희는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개념과 마주하고, 삶의 불안정성을 인식하게 된다. 그녀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지만,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그 변화는 눈빛, 자세, 주변을 바라보는 시선의 무게에서 느껴진다. 영화의 마지막, 은희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조용히 뒤돌아본다. 그 장면은 한 소녀의 변화와 성장을 압축한 듯한 순간이다. 여전히 고단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이제 은희는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갖게 되었다. 어쩌면 아주 조금, 울 수 있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결론: 성장의 순간은 소리 없이 다가온다
벌새는 화려한 사건이나 빠른 전개 없이도 강한 잔상을 남기는 작품이다. 은희라는 소녀의 하루하루는 어른들에겐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그녀에게는 인생의 모든 것이 걸린 순간들이다. 가족의 무관심, 사회의 폭력, 관계의 부침 속에서 은희는 조용히 성장한다. 그리고 누군가의 진심 어린 시선 하나가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영화를 본 후 우리는 묻게 된다. “나도 누군가의 은희였던 적이 있었을까?”, 혹은 “지금 누군가의 은희를 외면하고 있진 않은가?” 벌새는 우리 모두가 지나쳐온 미세한 흔들림들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작지만 깊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