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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감독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 <멜랑콜리아>(2011)는 지구와 거대한 행성 ‘멜랑콜리아’의 충돌을 다루지만, 단순한 재난 영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우울증과 존재론적 불안을 깊이 탐구하며, 인간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철학적으로 고찰한다. 영화는 두 자매 저스틴(커스틴 던스트)과 클레어(샬롯 갱스부르)의 대비를 통해,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두 가지 태도를 보여준다. 이번 글에서는 <멜랑콜리아>가 담고 있는 철학적 의미를 분석하고, 라스 폰 트리에가 던지는 질문을 탐구해본다.
1. 우울과 허무주의: 저스틴의 시선
저스틴은 영화 초반부터 심각한 우울증을 겪고 있다. 그녀는 결혼식 날에도 기뻐하지 못하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조차 어려워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구가 멜랑콜리아 행성과 충돌할 것이 확실해지는 순간, 그녀는 점점 차분해진다.
이는 우울증과 허무주의(Nihilism)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 프리드리히 니체는 허무주의란 기존의 가치가 무너지고, 삶의 의미가 사라지는 상태라고 말했다.
- 저스틴은 원래부터 인생을 무의미하게 여기고 있었으며, 오히려 세계가 멸망할 운명이라는 사실이 확정되자 마음이 편안해진다.
- 이는 "세상은 어차피 의미가 없으므로, 끝이 온다고 해도 다를 것이 없다"는 극단적 허무주의적 태도를 반영한다.
또한, 실존주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스 신화>와도 연결된다.
- 카뮈는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삶을 받아들일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 저스틴은 세상이 끝나는 상황에서도 불안을 느끼지 않으며, 차라리 그 종말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라스 폰 트리에는 실제로 우울증을 앓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멜랑콜리아>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저스틴의 태도는 우울증 환자의 심리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죽음을 앞둔 인간의 감정이 반드시 공포일 필요는 없음을 보여준다.
2. 공포와 생존 본능: 클레어의 시선
반면, 저스틴의 언니 클레어는 정반대의 반응을 보인다.
- 그녀는 처음에는 과학자들의 말을 믿고 멜랑콜리아가 지구와 충돌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충돌이 확실해지자 극심한 공포에 빠진다.
- 가족을 지키고 싶어 하지만,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절망하고 불안해한다.
- 마지막 순간, 그녀는 끝까지 희망을 찾으려 하지만 결국 패닉 상태에 빠진다.
이는 실존적 불안(Existential Anxiety)과 관련이 있다.
-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롭지만, 그 자유 속에서 불안을 느낀다"고 말했다.
- 클레어는 살고 싶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무력감을 느낀다.
- 이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인간의 근본적인 불안을 반영한다.
라스 폰 트리에는 클레어의 모습을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현실적으로 묘사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느끼지만, 사실상 아무런 방법도 없다는 점에서 절망한다.
3. 자연 vs. 문명: 인간은 어디에 속하는가?
영화에서 멜랑콜리아 행성은 단순한 천체가 아니다. 그것은 거대한 자연의 힘이며, 인간의 문명을 무너뜨리는 존재다.
- 영화 초반, 클레어의 남편 존(키퍼 서덜랜드)은 "과학적으로 계산해 보면 멜랑콜리아가 지구를 스쳐 지나갈 것"이라고 말하며 낙관한다.
- 하지만 결국 그의 믿음은 무너지고, 그는 가족을 버리고 자살한다.
- 이는 인간이 문명을 통해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지만, 결국 자연 앞에서는 무력한 존재임을 보여준다.
이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철학과 연결된다.
- 하이데거는 인간이 "세계-내-존재(Being-in-the-world)"라고 말했다.
- 즉,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지만, 문명을 통해 자연을 초월하려 한다.
- 하지만 <멜랑콜리아>는 "인간은 자연을 초월할 수 없으며, 결국 자연의 일부로 돌아간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4. 마지막 순간,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저스틴과 클레어, 그리고 클레어의 아들은 함께 나무 가지로 만든 ‘마법의 동굴’ 안에 앉아 지구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다.
이 장면은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클레어는 끝까지 희망을 찾으려 하지만, 결국 절망한다.
- 저스틴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조카에게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 하늘이 붉게 물들고, 강렬한 빛과 함께 지구가 멸망한다.
이 장면은 스토아 철학의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 사상을 반영한다.
- 니체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긍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 저스틴은 죽음을 피하려 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을 조용히 받아들인다.
- 반면 클레어는 운명에 저항하려 하지만, 결국 무너진다.
결론: 영화가 던지는 질문들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콜리아는 단순한 재난 영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우울과 허무, 존재와 자연,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철학적 문제를 탐구한다.
- 우리는 삶을 의미 있게 살아가고 있는가?
- 죽음을 앞두었을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 인간은 문명을 통해 자연을 극복할 수 있는가?
이 영화는 그 답을 명확히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저스틴과 클레어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라면 어떤 태도를 가질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결국, 멜랑콜리아는 우울과 종말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스스로의 철학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