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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버닝>(2018)은 이창동 감독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영화는 원작의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한국 사회의 불평등, 청년 세대의 불안,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특히 동양과 서양의 철학이 이 작품 속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번 글에서는 <버닝>이 가진 철학적 의미를 하루키 문학과 비교하며 분석해본다.
1. 존재의 불확실성: 무라카미 하루키 vs. 이창동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한다. 하루키의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불확실성, 부조리, 내면세계와 현실의 경계를 주요 테마로 삼는다. 영화 <버닝>도 이러한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한국 사회의 특수한 배경을 녹여낸다.
영화에서 종수(유아인)는 벤(스티븐 연)이라는 정체불명의 부유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벤은 스스로를 "헛간을 태우는 취미가 있다"고 말하며, 종수는 그가 실제로 실종된 해미(전종서)를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한다. 하지만 영화는 끝까지 확실한 답을 주지 않는다. 이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한 하루키적 세계관을 반영한다.
이러한 모호성은 장 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과 연결된다.
- 사르트르는 인간이 불확실한 세계 속에서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고 보았다.
- 종수는 해미의 실종을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결국 벤을 살해하는 극단적 행동을 선택한다. 이는 자신만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창동 감독은 원작과 달리, 한국 사회의 현실적인 요소를 강하게 반영했다. 원작에서 벤의 캐릭터는 모호한 존재로 남지만, 영화에서는 기득권층과 사회적 불평등의 상징으로 그려진다. 이창동의 <버닝>은 하루키의 모호한 철학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의 계급 갈등과 젊은 세대의 분노를 더 강하게 드러낸다.
2. 벤과 종수: 초연한 강자 vs. 불안한 약자
영화 속 벤과 종수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인물들이다. 벤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항상 여유롭다. 반면, 종수는 가난하고 불안하며,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벤은 니체의 초인 사상을 떠올리게 한다.
- 니체는 초인을 사회적 도덕을 초월한 존재로 보았다.
- 벤은 사람을 죽였을 수도 있지만, 죄책감을 느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는 법과 윤리에서 벗어난 ‘초월적 인간’처럼 행동한다.
반면, 종수는 카프카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에서는 주인공들이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과 억압 속에서 살아간다.
- 종수는 벤이 해미를 죽였다고 확신하면서도,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한다. 그는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사회 시스템은 무기력하기만 하다.
- 결국 그는 벤을 직접 죽이는 선택을 한다. 하지만 이는 진실을 찾았다기보다, 자신의 불안을 끝내기 위한 행동일 가능성이 크다.
이 장면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떠올리게 한다.
- 도스토옙스키의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강자는 약자를 죽여도 되는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하려 한다.
- 종수 역시 벤을 죽이며, 자신이 정의를 실현한다고 믿지만, 그것이 진정한 해결책인지는 알 수 없다.
이처럼 영화 <버닝>은 니체의 초인 사상과 카프카적 불안, 도스토옙스키의 도덕적 고민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3. 해미와 불의 의미: 존재의 본질과 소멸
영화 속 해미는 매우 중요한 상징적 존재다. 그녀는 "어릴 때 우물에 빠진 적이 있는데,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는 그녀의 존재가 얼마나 불확실한지를 보여준다.
영화에서 해미의 실종은 그녀가 현실에서 완전히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종수는 그녀를 기억하며, 그녀를 찾기 위해 벤을 의심하고 조사한다. 결국, 그녀의 존재 여부보다 그녀가 남긴 흔적과 기억이 더 중요하게 남는다.
이는 불교의 무상(無常) 사상과 연결된다.
-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변화하고 소멸하는 것을 ‘무상’이라 한다.
- 해미는 결국 사라졌지만, 그녀의 존재는 종수의 기억 속에서 계속 남아 있다.
- 종수는 벤을 죽임으로써 그녀를 되찾으려 하지만, 그것이 의미 있는 행동이었는지는 모호하게 남는다.
또한 영화에서 ‘불’은 중요한 상징이다.
- 벤은 "나는 가끔 헛간을 태운다"고 말한다.
- 종수는 벤을 죽이고 그의 차에 불을 지른다.
- 불은 파괴와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종수의 행동이 단순한 복수인지, 아니면 새로운 자신을 찾기 위한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처럼 <버닝>은 존재와 소멸, 기억과 의미의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결론: 영화가 던지는 질문들
영화 <버닝>은 하루키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의 계급 갈등과 실존적 불안을 더 강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 우리는 현실 속에서 얼마나 확실한 진실을 알 수 있는가?
- 강자는 약자를 초월한 존재인가, 아니면 단지 권력을 가졌을 뿐인가?
- 기억과 존재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결국, <버닝>은 단순한 미스터리가 아니라, 존재와 의미에 대한 깊은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