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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널스(2021)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기존 공식을 탈피한 독특한 작품으로, 초인적 능력을 지닌 존재들이 인간 세계 속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과정을 통해 ‘신이 인간처럼 느끼는 것’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클로이 자오 감독의 연출 아래, 이터널스는 시네마틱 액션보다는 인물의 내면, 감정, 존재의 의미에 더 집중하며 마블 유니버스의 확장된 세계관 속에서 가장 사색적인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1. 이터널스에서 신적인 존재의 딜레마: 창조자에게 반기를 든다는 것
이터널스는 ‘셀레스티얼’이라는 창조자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수천 년 동안 인류를 보호해 왔지만, 실상은 인간을 키워 셀레스티얼의 탄생을 위한 ‘씨앗’으로 삼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 설정은 종교적 은유와 철학적 논의를 함께 품고 있다. 이터널스는 일종의 ‘천사’ 같은 존재로 보일 수 있지만, 인간과 오랜 시간 교류하며 감정과 윤리를 배운 끝에, 자신들의 창조자에게 반기를 든다. 이러한 구조는 마치 신화나 구약 성경 속 이야기와 닮아 있다. 창조된 존재가 창조주에게서 독립하려는 서사는 인간이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터널스에서는 오히려 인간을 보호하고자 하는 도덕적 선택으로 그려진다. 특히, 이카리스가 셀레스티얼의 뜻에 충성하려는 입장을 고수하며 내부 갈등이 심화되는 구조는, 각 캐릭터가 단순히 선악으로 나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런 갈등 구조는 영웅이 단지 ‘세상을 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옳음과 믿음 사이에서 고민하는 존재’라는 점을 부각시키며, 기존 마블 영화와는 다른 깊이를 제공한다. 신적인 존재가 자신의 임무와 양심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딜레마는, 결국 인간적인 윤리 의식을 중심에 두는 작품의 핵심이다.
2. 인간과의 공존, 이별, 사랑 – 감정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이터널스는 이터널들이 단순한 전사나 지시를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 감정을 지닌 ‘인격체’로 살아가고 있음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이들의 인간과의 관계는 단순한 보호자가 아닌 연인, 친구, 스승, 동료 등 다양하게 표현되며, 특히 세르시와 이카리스, 그리고 세르시와 데인과의 관계는 이터널들의 감정이 인간만큼이나 복잡하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이터널들이 느끼는 감정은 인간보다 더 깊을 수도 있다. 수천 년을 살아오며 수많은 문명의 흥망을 지켜봤고,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어왔지만, 인간과는 다른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감정을 감내해야 했다. 이카리스는 사랑과 충성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가장 인간적인 선택—자기 부정과 희생—을 택한다. 드루이그는 인간들의 폭력성을 막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억누르려 하며, 길가메시는 기억을 잃어가는 시나를 끝까지 지키며 헌신한다. 이러한 모습들은 이터널들이 감정을 지닌 존재일 뿐 아니라, 감정 때문에 상처받고 고민하며 성장하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인간과의 이별과 죽음을 경험한 이터널들이 더 이상 ‘무감정한 신’이 아니라, ‘고뇌하는 인간적 신’으로 그려지는 점은 이터널스를 특별하게 만든다. 이는 초월적인 존재가 감정을 가지면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3. 마블 세계관 안에서의 철학적 실험
이터널스는 MCU의 26번째 작품이지만, 이전의 마블 영화들과는 결이 다르다. 전통적인 슈퍼히어로 서사—즉, 악당과의 대결, 액션 중심의 스토리, 영웅의 승리—에서 벗어나,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는 존재들이 ‘왜’ 싸우는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클로이 자오 감독은 전작 노매드랜드에서도 그랬듯, 인간의 존재 이유와 자연 속에서의 위치를 성찰하는 스타일을 이어간다. 이를 마블의 초인적 존재들에게 적용함으로써, 이터널스는 시네마틱 유니버스 안에서 실험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많은 관객들이 이 작품을 ‘마블스럽지 않다’고 평가하지만, 이는 오히려 MCU가 단순한 블록버스터 프랜차이즈를 넘어, 보다 깊이 있는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시이기도 하다. 특히, 셀레스티얼의 존재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규모의 시간과 생명의 사이클을 보여준다. 이터널들의 임무는 단순한 보호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 탄생을 위한 ‘희생’을 요구받는다. 이는 인간의 삶이 ‘전체를 위한 일부’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무거운 주제를 제시한다. 하지만 결국 영화는 ‘개인의 삶도 가치 있다’는 메시지로 귀결되며, 마블의 색채를 유지하면서도 철학적인 실험을 성공적으로 해낸다.
결론: 신이 인간을 닮았을 때,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되는가
이터널스는 전통적인 슈퍼히어로 서사를 벗어나, 신적인 존재들이 인간적인 고뇌를 겪으며 ‘어떤 선택이 옳은가’를 고민하는 이야기다. 그들은 명령을 받는 존재였지만, 결국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감정을 배우고, 윤리적 결정을 스스로 내린다. 사랑, 슬픔, 희생이라는 인간의 감정을 체득해가는 이터널들의 여정은, 관객에게 ‘신도 인간처럼 아파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새로운 시선을 제시한다. 이 영화를 본 후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된다. "만약 내가 전지적 존재라면, 인간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이터널스는 그 답을 명확히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선택 그 자체의 의미를 묻고, 감정을 가진 존재로서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를 성찰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