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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널스〉와 〈왓치맨〉은 초인의 존재를 중심으로 한 히어로물이지만, 그들이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두 작품은 ‘신과 같은 힘을 가진 존재는 인간을 구원해야 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며, 초인의 윤리, 책임, 무력감까지 폭넓은 철학적 사유를 담는다.
이너널스와 왓치맨에서 신은 왜 인간을 구하지 않는가
〈이터널스〉에서 이터널들은 문자 그대로 ‘신적 존재’다. 인간보다 오래 살아왔고, 문명을 지켜보며 지구의 발전에 간접적으로 개입해왔다. 그러나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개입하지 않기로 되어 있다. 이유는 그들이 섬기는 창조주 ‘셀레스티얼’의 명령 때문이다. 인류를 멸망에서 구할 수 있는 힘이 있음에도 그들은 지켜보기만 한다. 이 선택은 관객에게 불편함을 안긴다. “왜 저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반면 〈왓치맨〉에서의 닥터 맨해튼은 물리적으로 전지전능에 가까운 존재지만, 점점 인간 사회에 대한 관심을 잃어간다. 그는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시간을 선형이 아닌 동시에 인식하며, 그 결과 인간의 문제를 ‘이미 결정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베트남 전쟁에 투입되기도 하지만, 그 개입은 ‘정치적 수단’이었을 뿐 인간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 두 작품은 모두 초인의 ‘침묵’과 ‘거리두기’를 그린다. 초인은 세상을 구할 수 있지만, 스스로 구원자가 되기를 거부한다. 〈이터널스〉에서는 갈등이 내부에서 발생한다. 세르시는 인간을 사랑하고 돕고 싶지만, 이카리스는 운명대로 지구가 파괴되는 것을 막지 않으려 한다. 반면, 〈왓치맨〉은 그 거리감이 닥터 맨해튼이라는 단일 인물에 집중되어 있다. 그는 인간성에서 벗어나며 초인이 된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잃는다. 흥미로운 점은, 두 작품 모두 인간이 절대적인 존재에게 기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초인은 신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더라도 그것을 ‘자연의 이치’ 혹은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존재다. 결국 인간의 구원은 신적인 존재가 아닌, 스스로의 판단과 행동에서 비롯돼야 한다는 점을 드러낸다.
책임과 윤리, 구원자로서의 딜레마
〈이터널스〉의 주요 갈등은 ‘창조주의 명령에 따를 것인가, 인간을 위해 반역할 것인가’에 있다. 이터널들은 수천 년간 창조주 아리셈의 명령에 따라 디비언츠를 제거해 왔지만, 알고 보니 그 모든 활동은 셀레스티얼의 탄생을 위한 ‘시스템 유지’였다. 지구는 희생되어야 하는 운명이었고, 이터널은 그 시스템의 일부였다. 그러나 세르시, 드루이그, 마카리 등은 이를 거부하고 지구를 지키기 위해 동료 이카리스와 맞선다. 여기서의 핵심은 '불복종’이다. 초인의 윤리는 단순히 명령을 수행하는 데 있지 않으며, 진정한 윤리는 자유의지에서 비롯된 선택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세르시는 셀레스티얼을 거스르고, 인간을 구함으로써 신의 질서를 부정한다. 이 선택은 결국 ‘구원자’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다시 묻게 한다. 〈왓치맨〉의 구도는 더 냉소적이다. 오지만디아스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뉴욕에 핵테러를 조작하고, 수백만 명을 희생시킨다. 그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 일부는 희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닥터 맨해튼도 그 판단에 동의한다. 그는 이 진실을 감추는 데 가담하며, 거짓 위에 유지된 평화를 받아들인다. 이 결정은 초인의 윤리가 인간의 윤리와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은 한 생명의 희생도 안타까워하지만, 초인은 ‘큰 그림’을 선택한다. 결국 두 작품 모두 초인이 구원을 시도하지만, 방식은 극명히 다르다. 〈이터널스〉는 공감과 연민에서 비롯된 선택이며, 〈왓치맨〉은 냉철한 계산과 무감각한 정의에서 비롯된 선택이다. 전자가 이상을 위한 희생을 거부한 반면, 후자는 이상을 위해 희생을 받아들인다. 어느 쪽이 옳은가? 영화는 그 답을 강요하지 않지만, 관객은 각자의 기준에 따라 판단하게 된다.
신은 인간보다 도덕적일까, 혹은 더 비도덕적일까
흥미로운 점은, 두 작품 속 초인들이 인간보다 더 윤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터널스〉의 셀레스티얼은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행성을 파괴한다. 그의 논리는 ‘우주 전체의 균형’이라는 거대한 스케일에 기반하지만, 개별 생명에 대한 존중은 없다. 〈왓치맨〉의 닥터 맨해튼 역시 감정의 차단을 통해 ‘비인간적인 평화’를 수용한다. 이들은 신에 가까운 존재지만, 동시에 인간의 도덕 기준에서는 낯설고, 때로는 위협적인 존재다. 반대로, 진짜 ‘인간적인’ 선택은 인간이 내린다. 〈이터널스〉의 인물들이 창조주를 배신하고 지구를 구하는 선택은 인간성과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왓치맨〉에서는 로어셰크가 끝까지 진실을 밝히려다 죽음을 택한다. 그는 거대한 평화의 담보보다 ‘진실’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이런 인물들의 모습은 오히려 신보다 더 윤리적인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두 작품은 신과 초인의 도덕성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신은 선한가? 초인은 정의로운가? 이터널스와 닥터 맨해튼을 통해 영화는 그 답이 항상 ‘그렇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은 신의 판단과 인간의 윤리 사이의 간극을 바라보게 되며, 그 안에서 스스로의 기준을 세우게 된다.
결론: 초인이 아닌 인간이 세상을 바꾼다
〈이터널스〉와 〈왓치맨〉은 모두 초인에 대한 낭만을 해체하는 작품이다. 강력한 존재가 항상 올바른 선택을 하지 않으며, 때로는 구원이 아닌 파괴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두 영화 모두, 진정한 변화는 인간적인 공감, 연대, 그리고 윤리적인 선택에서 비롯된다는 공통된 메시지를 전한다. 이 영화를 본 후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세상이 무너질 때, 우리는 구원을 기다릴 것인가, 스스로 선택할 것인가?” 초인은 멀리 있지만, 인간의 손은 여전히 가까이 있다. 그리고 그 손이 진짜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