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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 스피치(2010)와 위플래쉬(2014)는 언뜻 보면 전혀 다른 장르의 영화다. 전자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역사 드라마이며, 후자는 음악을 배경으로 한 심리 스릴러에 가까운 성장 서사다. 그러나 두 영화 모두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중심으로, 주인공이 내면의 결핍과 공포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는 점에서 놀라운 공통점을 지닌다. 특히, 두 작품은 ‘성장’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방식의 지도와 어떤 관계가 유효한지를 전혀 다르게 제시하면서, 관객에게 깊은 사유의 기회를 제공한다.
1. 킹스 스피치와 위플래쉬, 두려움과 결핍에서 출발한 주인공들
킹스 스피치의 주인공 버티, 즉 조지 6세는 어린 시절부터 말을 더듬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왕이라는 상징적인 위치에 있으면서도, 대중 앞에서 연설을 해야 할 때마다 극심한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 특히 무거운 국정 책임이 그에게 주어졌을 때, 그는 자신의 언어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면 지도자로서 자격이 없다고 느낀다. 그의 결핍은 단순히 신체적인 문제를 넘어,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와 존재감을 흔드는 문제다. 위플래쉬의 앤드류는 최고의 재즈 드러머가 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지닌 청년이다. 그는 자신의 실력과 의지를 증명하고 싶지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곧 불안과 강박으로 이어진다. 특히, 플레처 교수의 가혹한 지도 방식은 앤드류를 끊임없는 심리적 압박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의 결핍은 외부의 평가에 지나치게 휘둘리는 자존감이며, 이는 점점 집착에 가까운 목표 추구로 바뀌어간다. 두 인물 모두 스스로 ‘완전하지 않다’는 인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왕이면서도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재능이 있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음악가 지망생이라는 위치에서, 그들은 각자의 무대에서 자신을 증명하려 한다. 이들의 출발점은 다르지만, 그 안에 흐르는 불안과 결핍은 매우 유사하다.
2. 완전히 다른 방식의 스승들, 리더십의 대조
버티의 언어 치료를 맡은 라이오넬 로그는 따뜻하고 인내심 있는 치료사다. 그는 권위나 사회적 위치에 얽매이지 않고, 버티를 한 인간으로 바라본다. 그의 방식은 버티의 트라우마와 내면의 상처를 인정하고, 그것을 천천히 어루만지며 극복해나가는 것이다. 그는 강요하지 않고, 시간을 들여 신뢰를 쌓는다. 이 관계는 점점 ‘치료자와 환자’를 넘어, ‘친구’로 발전하며 버티에게 감정적인 지지를 제공한다. 반면, 위플래쉬의 플레처는 전형적인 폭군형 스승이다. 그는 학생들을 철저하게 압박하며, 공포를 통해 한계를 넘기려 한다. 그의 방식은 고통과 수치를 수단으로 삼고, 심지어 학생들의 정신을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간다. 플레처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진정한 천재는 역경을 통해 탄생한다’는 논리를 편다. 이는 리더십의 가장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예술과 완성에 대한 잔혹한 철학을 드러낸다. 두 스승은 정반대의 접근을 한다. 하나는 인간을 먼저 보고, 다른 하나는 결과만을 본다. 관객은 각 방식의 결과와 후폭풍을 보며, ‘성장’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무엇이 옳은 방식인가를 되돌아보게 된다. 특히 플레처의 방식은 결과적으로 앤드류의 기량을 끌어올렸지만, 그 대가로 상처와 왜곡된 자아를 남긴다.
3. 진정한 성장의 조건은 무엇인가?
버티는 왕으로서 대중 앞에 선다는 자신의 역할을 끝내 수행하게 된다. 그가 극복한 것은 단순한 언어장애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신뢰 부족이었다. 라이오넬은 그가 왕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도 충분히 가치 있고 존엄한 존재임을 끊임없이 상기시켰고, 이를 통해 버티는 왕이라는 무게를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그가 전쟁 발발 직후 대국민 연설을 무사히 마치는 장면은 단지 ‘말을 잘했다’는 의미를 넘어, 한 인간이 자기 존재를 수용하고 타인을 위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는 상징이다. 앤드류는 플레처의 끊임없는 압박을 견디며 드럼 연주의 극한에 도달한다. 마지막 연주 장면에서 그는 플레처의 의도조차 뛰어넘어, 무대 전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플레처는 그를 조종하려 했지만, 역설적으로 그 무대는 앤드류가 ‘자기 자신’으로서 주체적으로 연주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앤드류는 멍이 들고, 피를 흘리며, 인간 관계는 모두 무너진다. 그는 완성에 가까워졌지만,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했다고 말하기엔 무언가를 잃었다. 두 작품은 결국 관객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 “진정한 성장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져야 하는가?” 버티는 인간적인 지지를 통해 자기 확신을 얻었고, 앤드류는 고통을 통해 천재성의 문턱을 넘었다. 하나는 공동체와 연결되었고, 다른 하나는 철저히 고립되었다. 성장의 과정은 결국 그 사람이 ‘무엇을 감당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결론: 성장의 이름으로 무엇을 견뎌야 하는가
킹스 스피치와 위플래쉬는 서로 다른 장르 속에서, 한 인간이 어떻게 성장하고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는지를 보여주는 강렬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 여정에 함께하는 ‘스승’의 존재는 전혀 다르며, 그 방식에 따라 결과도, 상처도, 자아의 상태도 달라진다. 한 영화는 인간적 지지와 존중을 통해, 다른 영화는 극단적 통제와 경쟁을 통해 주인공을 밀어붙인다. 그리고 두 영화 모두, 성장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이 두 작품을 통해 우리는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성장이라는 명목 아래, 우리는 누구의 방식을 선택할 것인가?” 그리고 “그 선택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