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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과 캐롤(2015)은 각각 프랑스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여성 간의 사랑을 다룬 작품이다. 두 영화는 시대적 배경, 사회적 제약, 인물 간의 감정 표현 방식이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말할 수 없는 사랑'이 중심에 놓인다. 직접적인 고백보다 시선, 침묵, 그리고 감정을 담은 행동들로 교감하는 두 작품은 사랑이 겪는 억압과 그 안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움을 세심하게 포착한다. 이 글에서는 두 영화의 연출 방식과 감정 표현, 결말에서 드러나는 시선의 차이를 중심으로 비교해 본다.
1.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캐롤, 억압된 사회 속 사랑 표현 방식의 차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18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다. 화가 마리안은 귀족 여성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몰래 그리기 위해 고용된다. 두 사람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점점 가까워지고, 결국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엘로이즈의 결혼이라는 사회적 운명에 의해 유한함을 전제로 시작된다. 그들은 이별을 알고 있으면서도 서로에게 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이를 시선과 몸짓, 예술을 통해 표현한다. 반면, 캐롤은 195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하며, 이 시기는 동성애가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았던 시절이다. 캐롤과 테레즈의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우정'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진한 감정이 흐른다. 캐롤은 이혼과 양육권 분쟁 속에서 자신의 성적 지향을 숨겨야 했고, 테레즈는 처음 겪는 사랑에 혼란을 느끼며 자신을 점차 깨달아간다. 두 사람은 말보다는 시선과 침묵으로 감정을 전달하며, 특히 공간의 사용과 조명이 감정의 흐름을 대변한다. 두 영화 모두 '사랑을 말하지 못하는 환경'에서 주인공들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고 나누는지를 섬세하게 다룬다. 시대적 억압과 사회적 시선 속에서 사랑이 만들어내는 긴장감은 두 영화 모두에서 감정적 깊이를 더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인물들의 내면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만든다.
2. 감정의 연출 방식, 시선과 예술의 언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회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감정이 전개된다. 마리안은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그녀의 움직임, 표정, 손짓 등을 은밀히 관찰한다. 이 과정은 단순한 묘사가 아닌 감정적 교류가 된다. 영화의 중심에는 ‘응시’가 있다. 서로를 응시하는 시선은 감정을 드러내는 유일한 언어가 되며, 마리안의 눈에 비친 엘로이즈는 점점 더 생생하게 살아난다.
반대로 캐롤은 사진이라는 매개체를 중심으로 감정을 풀어낸다. 테레즈는 사진에 관심이 많고, 캐롤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그녀를 찍기 시작한다. 그녀의 카메라 렌즈는 캐롤의 일상을 기록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감정을 포착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두 사람의 감정은 대화보다는 자동차 안, 백화점의 거울, 호텔방의 침묵 속에서 펼쳐진다. 토드 헤인즈 감독은 대사보다 공간과 오브제를 활용한 연출로 감정을 부드럽게 드러낸다. 흥미로운 점은 두 영화 모두에서 예술이 감정의 매개가 되며, 동시에 ‘기억’을 보존하는 도구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마리안은 엘로이즈를 그림으로 남기고, 테레즈는 캐롤을 사진으로 남긴다. 예술은 관계가 지속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유일하게 남을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이 그들에게 사랑을 '기억'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3. 이별의 방식, 그리고 사랑이 남긴 흔적
두 영화는 모두 이별로 끝난다. 하지만 이별을 대하는 방식과 그 감정의 결은 매우 다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마리안과 엘로이즈는 끝내 함께하지 못하지만, 그 이별은 강렬하고 아름답다. 마지막 연주는 엘로이즈가 마리안과의 추억을 떠올리는 장면으로, 카메라는 단 한 번도 컷을 나누지 않고 그녀의 감정이 차오르는 얼굴을 오랫동안 비춘다. 이는 사랑이 끝났어도, 그 감정이 얼마나 강하게 남아 있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클라이맥스다. 캐롤에서는 보다 복잡한 감정의 흐름이 존재한다. 두 사람은 갈등 끝에 잠시 이별하지만, 캐롤은 용기를 내어 테레즈에게 ‘함께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테레즈는 즉각적인 선택을 하지 않고, 혼란스러운 감정 속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레스토랑에서 캐롤과 다시 마주치며, 둘 사이에는 대화 대신 미묘한 미소가 오간다. 이는 명확한 재결합보다는 가능성과 희망을 암시하는 열린 결말이다. 결국 두 영화 모두에서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거나 영원하지 않지만, 그것이 무가치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랑이 인물들을 성장시키고, 스스로를 이해하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사랑은 끝났지만, 그것이 남긴 잔향은 그들의 삶을 깊게 만든다.
결론: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감정, 사랑의 형상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캐롤은 시대도, 나라와 문화도 다르지만, 금기된 사랑을 가장 섬세하고 예술적으로 표현해낸 작품들이다.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시선과 예술을 통해 전하는 두 영화는, 오히려 그 제약 속에서 더 깊고 진한 감정을 만들어낸다. 이들의 사랑은 격정적이지 않지만, 오히려 그 절제된 표현 속에 강한 울림이 존재한다. 이 두 영화를 본 뒤,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말하지 못한 감정은 사라지는가, 아니면 더 오래 남는가?" 그리고 그 사랑이 이루어졌는가보다, "그 사랑이 나를 어떻게 바꾸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캐롤은 그 대답을 시선과 침묵, 예술과 기억 속에 고요히 담아낸다.